[얀슈반크마이어] 대화의 가능성

 

방금 전에 얀 슈반크마이어 감독의 클레이 애니메이션 Food에 대한 리뷰를 썼다. 너무나도 재미있게 본 작품이라 그의 전작들도 보고 싶어서 찾게 되었다. 모든 클레이 애니메이션의 결정체라고 불리우며 얀 슈반크마이어 감독의 최고 걸작이라는 칭송을 듣는 작품인지라 큰 기대를 하고 보게 되었다.

 

그리고 역시 충격. 도대체 어떻게 이러한 세계를 그려내는거지? 더군다나 이 작품은 1982년도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내가 태어나지도 않은 그 해의 작품인데, 지금 봐도 소름 끼칠 정도이다.

 

대화의 가능성 역시 Food와 마찬가지로 3개의 독립된 단편극으로 이루어져있다. 각 에피소드들은 4분정도 되 금방 볼 수 있는 애니메이션이다. 사실 이렇게 짧은 단편 애니메이션 혹은 영화들은 그 단편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잃어버리거나, 재미 보다는 실험적인 영상이 나오는 경향이 있다. (미국 리얼리티 TV쇼의 On The Lot의 황당한 단편들만 봐도 알리라)

 

그런데 대화의 가능성의 모든 대화들은 그렇지 않다.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영상이 펼쳐짐과 동시에 재미도 있고, 짧은 시간내에 자기가 하고 싶은것을 기관총 처럼 따다다 이야기 한다.

 

 

1부 영원의 대화

 

 

먼저 1부인 영원의 대화. 야채로 이루어진 사람, 기계로 이루어진 사람, 책과 여러가지 필기도구로 이루어진 사람이 있다. 야채로 이루어진 사람은 기계로 이루어진 사람을 잡아 먹으며 기계로 이루어진 사람은 책으로 이루어진 사람에게 잡혀 먹는다. 채긍로 이루어진 사람은 야채로 이루어진 사람에게 잡혀 먹고 야채로 이루어진 사람은 기계로 이루어진 사람에게 잡혀먹는다. 먹고 뱉어내고 먹고 뱉어내고 하는 방식이 계속해서 이루어지다가 나중에는 모두들 섞여 진흙 인간이 되어 버린다.

 

거기서 멈추면 안되지. 진흙 인간은 계속해서 서로를 잡아 먹다가 하나의 진흙 인간을 만든다. 그 진흙 인간은 계속해서 자신을 분열 시킨다. 1부인 영원의 대화는 그렇게 막을 내린다.

 

다 보고나니 머리가 얼얼했다. 야채로 이루어진 사람... 기계로 이루어진 사람... 책으로 이루어진 사람... 그 사람들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나는 이렇게 해석했다. 야채로 이루어진 사람은 가장 낮은 농민 계급을 상징하고, 기계로 이루어진 사람은 기계를 다루는 노동자 계급을 상징한다. 책으로 이루어진 사람들은 그 위에 있는 지식인들 혹은 사장들을 나타내는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하면 딱 들어맞지 않는가?

노동자 계급은 농민 계급을 잡아 먹는다. 지식인들은 노동자들을 잡아 먹는다. 농민들은 그에 반발해 지식인들을 잡아 먹는다. 먹이 사슬은 계속되고, 그들은 계속해서 잡아 먹어 사회의 불안을 계속해서 생성해 나간다.

 

하지만 그들이 전부 모이자, 그들은 전부 똑같은 점토 인간에 불과하다. 그런데에도 왜 그들은 서로를 잡아 먹는 것일까? 우리는 여기서 이 작품의 제목에 주의해야 한다. 영원의 대화. 그리고 대화의 가능성. 그렇다. 얀 슈반크마이어는 대화의 가능성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전에 봤던 Food라는 작품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상당수가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약육강식. 지극히 강자가 약자를 잡아 먹고, 약자가 반발하면 강자를 잡아 먹고, 다시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는 이 세상. 그런데... 도대체 왜 서로를 잡아 먹는 것일까?

 

우리는 모두 같은 '인간'이다. 그들은 모두 같은 '진흙 인간'이다. 그런데 왜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나있는 것일까?

 

 

 

2부 정열의 대화

 

 

나는 그 질문을 계속해서 마음에 품은채 2부인 '정열의 대화'를 보기 시작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테이블에 앉아 있는다. 그들은 서로를 원해 뜨거운 정사를 나누게 되고, 뭉개진 그들 사이에서 한 생명이 태어나게 된다. 그 생명은 여자에게로 다가가지만 여자는 남자에게 그 생명을 주게된다. 하지만 그 남자 또한 그 생명을 원하지 않는다. 결국 서로 그 하나의 생명을 미루다가 그들 끼리 헐뜯고 싸워 파멸을 맡게 된다.

 

정열의 대화는 굉장히 독특한 방식으로 주제를 보여주고 있다. 진흙과 진흙이 하나로 뭉쳐지고 녹아드는 장면이 굉장히 재미있다. 손으로 죽죽 긁은 듯한 느낌이 뜨거운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또한 하나의 큰 덩어리에서 정사의 한 장면, 한 장면이 순간적으로 보인다는 것이 굉장히 로맨틱 하고 아름다웠다.

그렇지만 후반부에 나오는 그 싸움 장면은 똑같은 기법으로 되어 있지만 분위기가 완전 다르다. 서로가 서로를 찢고 물어 뜯다가 한 커다란 덩어리로 뭉칠 때, 내 마음속에 어떠한 감정이 폭팔하는 것을 느꼈다. 하나의 큰 덩어리에서 정사의 한 장면이 나왔다면 이젠 싸우는 한 장면, 한 장면이 잠깐씩 보여지게 된다.

 

얀 슈반크마이어 감독은 똑똑하다. 어떤 이미지가 강렬하고, 어떤 이미지가 폭팔하는 이미지인지 잘 아는 사람이다. 정말 최고의 비쥬얼 아티스트다.

 

각설하고... 서로가 만들어낸 결과물을 서로가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는 이기주의적인 세상. 너무나도 이기적인 상황에 이르러 그들은 서로 싸우게 된다. 방금까지 있던 정열의 대화가 무색할 정도로 그들은 정열적으로 싸움에 임한다. 이런 이기주의. 회피할 방법은 있는가?

 

정말로 순수한 정열에 의해 피어나는 대화는 가능한가? 나는 또 다시 그런 의문을 가슴에 담아 두고 3부를 보기 시작했다. 3부인 불모의 대화는 위 대화들을 엮어줌과 동시에 '대화의 가능성'에 대해 어느 정도 삐뚤어진 답을 내려준다.

 

 

3부 불모의 대화

 

 

두 남자가 있다. 그들은 입 속에 무언가를 지니고 있다. 한 남자가 칫솔을 내밀면 다른 남자는 치약을 짜준다. 한 남자가 식빵을 내밀면 다른 남자는 버터를 발라준다. 한 남자가 연필을 내밀면 다른 남자는 연필깎이로 연필을 깎는다. 한 남자가 구두를 내밀면 다른 남자는 구두끈을 묶어준다. 그들은 그렇게 대화와 소통을 이어 나가다가 자리를 바꾼다. 그리고 그들의 대화는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한다.

 

한 남자가 칫솔을 내밀면 다른 남자는 그 칫솔을 연필깎이로 깎는다. 한 남자가 식빵을 내밀면 다른 남자는 그 식빵에 구두끈을 묶어준다. 한 남자가 연필을 내밀면 다른 남자는 그 연필에 치약을 짜준다. 이런 식의 어긋난 대화가 반복 되고 그들은 또 다시 자리를 바꾼다. 그러나 대화와 소통의 어긋남은 점점 악화될 뿐이다.

 

한 남자가 칫솔을 내밀면 다른 남자도 칫솔을 내민다. 칫솔은 서로를 칫솔질 해 칫솔이 나가고 막대기만 남게된다. 한 남자가 연필을 내밀면 다른 남자도 연필을 내민다. 연필은 연필끼리 찔러 가운데 부터 쩍 갈라지게 된다. 한 남자가 식빵을 내밀면 다른 남자도 식빵을 내민다. 식빵은 식빵끼리 싸워 결국은 거대한 밀가루 반죽이 되어버린다. 한 남자가 구두를 내밀면 다른 남자도 구두를 내민다. 두 구두들은 서로 싸운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죽어버린다.

 

그들은 처음에는 그럭저럭 잘 대화를 해나갔다. 상대방이 무엇을 말하면 다른 사람은 그 사람의 말에 호응을 해준다. 상대방이 질문을 하면 다른 사람은 그 사람의 질문에 대답을 한다.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면 다른 사람은 그것을 들어준다. 말하면 들어주고, 질문하면 답해주고. 호응해주고 순응하고. 따라해주고 따라주고. 그리고 그들은 자리를 바꿔서 또 다시 얘기를 한다.

 

그런데 좀 처럼 얘기가 잘 되지 않는다. 예전에는 맞던 부분이 지금은 잘 맞지 않는다. 서로의 차이점과 장단점을 더 잘 알게되어 서로를 꺼려하게 된다. 말의 논지를 잘 파악하지 못하고, 엉뚱한 답을 얘기 하기도 한다. 그리고 또 자리를 바꿔 얘기를 한다.

 

상황은 심해질 뿐이다. 서로 오해가 생겨 자주 다투게 된다. 서로 서로를 불신하게 되며 거짓말로 자신들을 지키려한다. 서로가 서로를 헐뜯고 욕하는 일이 번번치 않게 일어난다. 싸움. 그리고 그들은 결국 대화의 장을 만들어내지 못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주목해야할 점이 있다. 먼저, 자리를 바꾼다는 것은 시간의 일정한 흐름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시간이 지난 후, 그들은 다시 만나 이야기 한다. 자리를 바꾼다는 것은 그런 뜻이라고 생각된다.

 

우리가 또 주목해야할 점은 전체적인 커다란 틀의 제목이다. 대화의 가능성. 얀 슈반크마이어는 대화의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어한다. 1부에서 계급과 계급간의 대화와 소통의 가능성, 2부에서 남자와 여자의 대화와 소통의 가능성, 3부에서는 사람과 사람과의 대화와 소통의 가능성. 그러나... 모든 대화와 소통은 실패하게 된다.

 

얀 슈마크마이어는 우리의 일그러진 삶의 모습을 굉장히 단편적으로, 날카롭게 꼬집어 말한다. 진정한 대화는 없다고 말이다. 서로의 견해 차이는 분명히 있고, 그 견해차이는 실망으로 바뀌게 되며, 실망은 증오가 되고, 증오는 싸움이 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동물이라 진정한 대화와 소통의 길은 열려있지 않다. 얀 슈반크마이어는 이 것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대화의 가능성... 영원히 열리지 않을 대화의 가능성. 여러가지 생각을 해 볼 수 있었고, 무엇보다 형식미의 독창성과 영상의 창의성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단 2편만 봤지만 얀 슈반크마이어는 단연 뛰어나다.

by 우노히카 | 2008/03/19 01:10 | 또 느낀다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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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NIKEL at 2009/04/06 01:11
제가 봣을땐 1부에서 쇠로된 인간이 식기로 되어 있엇고, 마지막에 늘어나는것으로 보아
같은 점토인간이엇다는 점을 보여주려는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차인을 인정하지 못하고 점점 공격해나간 결과 개성이 없는 같은 존재가 되엇다는것을 표현하는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만,
이런식으로도 생각할수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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